갤러리박영

이경복Lee, KyoungBok

Baby room Urethane paint on canvas 91x91cm 2011

 

학력
2011 중앙대학교 대학원 서양화학과 재학중
2009 중앙대학교 서양화학과 졸업

개인전
2012 수집된 Identity, 갤러리박영, 파주
2010 Kunstdoc Project Space , KUNSTDOC , 서울
2009 Illusion , 윈도우 갤러리. 갤러리현대 , 서울

단체전 및 기획전

2010 Do window Vol.2 , 갤러리 현대 , 서울
2008 중앙대학교 60회 졸업전시 , 덕원 갤러리 , 서울
Class of 2009 , 갤러리 현대 ,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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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결국, 나를 훔쳐보다 - 유경희(미술평론가/미학박사)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릴 것이 없어진다).
 따라서 호지킨은 스케치를 하지 않으며 사진을 찍지도,
풍경이나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장면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될 때, 그 기억이 감정적으로 회화적인 무게를 얻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믿고 기다릴 뿐이다. 느끼는 것은 보는 것의 한 방식이다.
그림을 그릴만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그리고 기억에 의해 변형된 무엇이다.
또한 오랜 시간에 걸친 생각과 수없는 회상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림은 수많은 결심과 덧칠, 붓질이 쌓인 결과이다. 어떤 그림은 감정의 정확한 두께를 찾기 위해 몇 년에 걸쳐 그려지기도 한다.
-수전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 중에서-


모름지기 열정이란 혼돈과 가까이 있는데
수집가의 열정은 기억의 혼돈에 가까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나의 서재 공개] 중에서-

 

절시증 혹은 나르시시즘
이경복의 작업은 타인의 방을 훔쳐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애초의 관음증(voyeurism) 혹은 절시증(scopophilia)은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훔쳐보기는 대상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 즉 인식(앎)의 가장 원초적인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시각예술가는 어차피 관음과 절시의 달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단지 어떤 시선으로 대상을 어루만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라캉을 읽다보면, 우리의 시선은 이미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대상에 의해 시선을 던지도록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시선이 이미 응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나(자신)를 바라보는 너(타인)를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물아일여’의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이경복의 작품은 자신의 방 혹은 타인의 방에서, 관음을 통해 채집한 이미지들을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시선과 응시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작가가 채집한 이미지들이 그/그녀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이미 작가자신의 취향과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작가의 시선이 왜 이런 사물에 머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할 길이 막연해진다.
관음증 혹은 절시증은 페티시즘(fetishism)의 일종이다. 페티시는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대상의 대체물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 무엇은 어떤 의미에서는 ‘데자뷰’(deja vu:기시감)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런 이미지는 낯익음과 낯섦, 익숙함과 생경함의 경계에 있는 것들이다. 결국 타인(대상)을 통해 나 자신을 보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채택한 이미지들은 나르시시즘적인 대상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경복의 시선이 나르시시즘적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나르시시즘은 도착적이거나 신경증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너무 안전하고 인습적인 나르시시즘라고 할까? 사물을 지독하게 어루만지는 시선도 아니고, 교묘하게 탐닉하는 시선도 아닌 것이다. 그의 화면은 에로틱하지도 않으며, 역동적이지도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어쩌면 작가의 작품은 시선과 응시가 풍부하고 밀도있게 이루어지지 않은 다소 모호한 영역에 놓여있다는 느낌이 든다.

채집된, 메시지 없는 재현
이경복의 작품에 등장하는 채집된 물건들은 거의 공산품들이다. 책, 거울, 갖가지 공구, 인형, 레고블럭 등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일상용품과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그것이다. 작가는 주변사람 혹은 주변환경으로부터 온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이것을 다시 조합한다. 결국 그가 조합해내는 이미지들은 대상이 원래 놓여있던 지점에서 탈각되어 전혀 다른 장소에 놓이게 됨으로써 애초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품 속 이미지들은 채집되고 집적되었을 뿐, 어떤 특유의 분위기나 취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사물들은 아주 가깝게 중첩되어 있는데도 서로 무관심적이고, 기계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이 사물들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 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심리적 거리를 좁혀 놓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진정 작가는 이런 작업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프랭크 스텔라의 “당신에게 보이는 것은 바로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경복의 화면이 주는 매력은 거부할 수 없다. 그가 직접 대상이나 모델을 대면해 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채집된 이미지들을 디지털로 몽타주한다고 하더라도, 공업용 도료와 콤프레셔를 이용한 매우 기계적인 제작방식이라고 할지라도-이런 방법론은 현대작가들에게는 특별히 낯선 것도 아닐뿐더러-재현의 회화가 주는 고전적인 감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동시에 딜레마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저 잘 그려진, 그러니까 재현의 정확성만이 담보된 그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치 극사실회화가 정확한 재현을 넘어서는 미학적인 차원을 담보하지 않으면, 하나의 클리셰로 전락하기 십상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이경복의 회화 역시 테크닉만이 돋보이는 극사실주의 회화의 딜레마를 환기한다. 오늘날 특정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자기 고유의 감각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도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던 이유는, 철저하게 개념적인 메시지를 담보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셈이다. 의식의 체화로서의 육체의 사용을 극대화하는 회화를 보여줄 것인지, 아니면 지금과 같은 기계적인 회화방식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개념적 메시지를 좀 더 강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작가가 구현해내는 이런 그림들은 재현을 넘어서는 차원에 대한 미학적 담보물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경복의 이미지의 변주가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행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우연이나 우발에 의해서가 아닌 좀 더 치밀한 수사학적 전략을 세워야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경지, 익숙한 것이 비의적인 것으로, 진부한 것이 시적인 경지로 전이될 수 있지 않을까?!
 
텅빈 기표 혹은 산포된 기의
이경복은 아마도 애초에 채집된 이미지를 통해서 나름대로 타인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더불어 개인 혹은 타자가 속한 사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원했던 바와는 다르지만, 자신의 지평의 황폐함을 드러냄으로써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작가가 드러낸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더 이상 타자의 이미지가 아닌 스스로의 무의식의 이미지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작가가 임의로 가공한 이미지의 세계는 작가 스스로의 억압과 억압된 것의 회귀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무의식적 이미지들은 어쩌면 의미에 닻을 내리지 못해 기호가 되지 못해 부유하는 기표들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떠다니는 기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 어쩌면 그것은 고정된 의미가 되기를 포기한 경계의 정체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체계 속에 편입될 수 없는 자유롭게 부유하는 기표들의 총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야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다시 말해 고정된 정체성, 사회적 정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고정된 정체성을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으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표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의혹과 질문은 이제부터 작가가 하나하나 스스로에게 되물어야할 종류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바램은 작가가 지나치게 세련된 스타일리스트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스타일리스트라는 말 속에 포함된 차갑고 기계적인 냄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좋은 작품이란, 스타일이 확고한 작업보다 어떤 작품을 대면했을 때 과거이든 현재든 나(관자)의 경험을 실감나도록 나(무의식)를 환기시키는 작품들이다. 다시 말해, 시선과 응시의 교류, 공감과 감정이입의 세계를 암시하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유사한 스타일과 더불어 수상하고 미심쩍은 작품들이 산재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술가가 한번도 제대로 자기자신과 대면하려는, 투쟁과도 비슷한 잔인한 입문의식(이니시에이션)을 치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을 디자인하는 시대, 이 때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떠올려 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