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박영

강민수KANG Minsu


강민수  minsu kang


학력
2008 kunstakademie muenster / freie kunst 졸업
2007 마이스터쉴러 prof. Henk Visch
1996 홍익대학교 조소과 졸업


개인전
2013           
IDYLL- bring me my dollie / space CAN beijing / 북경
2012           
IDYLL 여행 / 화랑대 기차역 / 서울
2011           
IDYLL 아이들의 나날들 / 카이스 갤러리 / 서울
과거(기억에만 사는 생각) / 이마주 갤러리 / 서울
2010
드림팩토리, outside world  Idyll / 갤러리 박영 / 파주    
2008           
갤러리 Quartier 7  / 뮌스터 / 독일
1999           
Untitle / 삼정 아트센터 / 서울

 

 

그룹전
2014
“사라지다 vanishing” / 성곡미술관 / 서울
2013           
“가까운 미래, 먼위안” / 갤러리 화이트블럭 / 파주
“vue" / 갤러리 bk / 서울
2012            
“윈터 원더랜드”  / 스페이스 K  / 광주
“회화의 탐닉” / 이마주 갤러리 / 서울
“뫼비우스의 띠-신화적 사유를 삼키다” / 인터알리아 / 서울
“밤의 너비” / 금산갤러리 / 파주
2011          
“PEARL cross over” / 갤러리 박영 / 파주
“몹쓸 낭만주의” / 아르코 미술관 / 서울
“narrative structure" / 테오 갤러리 / 서울
“p.182 발췌” / 난지 스튜디오 갤러리 / 서울
“공생” / 갤러리 박영 / 파주
2010          
“서교난장2010 회화의 힘” / 상상마당 / 서울
"또 다른 나로서의 자아" / 관훈 갤러리 / 서울
"mapping mindscape" / 케이엔 갤러리 / 서울
"YMCA/YWCA" / 갤러리 이마주 / 서울
"존재의침전/감성의확장" / NH lakeside갤러리 / 용인
"서교육십 2010 상상의 아카이브" / 상상마당 / 서울 
“유년기로부터“ / 갤러리 아트사간 / 서울
2009          
"레몬트리" / 유엔씨 갤러리 / 서울
“So fern, so nah“ / 호리존테 재단 / 하노버 / 독일
“Bilder, Plastik, Trallala“ / 겔젠키르헨 미술관 / 독일
2008           
“Hedendaagse Visies“ / 이퍼 문화재단 / 라켄할레 / 벨기에
“Malerei 08 Zeitgenoessische Position“ / 쿤스트포룸NRW / 독일
“Ausgangsposition 1“ / 갤러리 DST / 뮌스터 / 독일
“Zirkus“ / 예스테부어그 미술관 / 독일
“Kunst in unserer Region“ / D.A. 쿤스트하우스 / 회어스텔 / 독일
“Figuerliche Malerei 2“ / 쿨투어반호프 엘러 / 뒤셀도르프 / 독일
“Korea ganz jung“ / 갤러리 open Art / 보어켄 / 독일


레지던시 
2009-2011
갤러리 박영 레지던시 2기 - 파주
2013            
P.S.B 16th artist 스페이스 캔 베이징 - 중국

 

essay

 

  

강민수의 회화 -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키드냅. 납치를, 특히 유아 내지는 아동 납치를 뜻한다. 현재 아동납치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더 이상 숨길 것도 숨길 수도 없는 공공연한 현실이며, 이런 공공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작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경우의 수만이 노출되고 공론화된다. 아동납치는 산업이다. 인종을 초월하고 이데올로기를 넘어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사업이며 음지산업이다. 이처럼 아동이 무차별적으로 납치되고 거래되는 이유는 어른들의 성적 노리개로서 소비하기 위한 것이며(성적 노예), 무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며(경제적 노예), 유산자 계급의 생명을 연장할 목적으로 필요한 장기를 적출하기 위한 것이다(생명 혹은 생물노예). 그리고 여기에 총알받이와 자폭단과 같은 전사로 키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이따금씩은 호된 훈련을 거쳐 서커스 단원으로 양육되기 위해서 아동이 납치되고 거래되기도 한다. 비공식적 루트로는 단연 납치가, 그리고 비록 공공연한 사실은 아니지만 잠정적인 공식적 채널로는 입양제도와 장기은행이 아동납치와 거래를 위해 전용(악용?)될 수가 있다. 

제도는 자신을 위해 이익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음지를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 그 속성상 음지를 양지로 편입하려드는데, 이런 제도의 욕망으로 보건데 아동납치와 거래를 위한 시장이 머잖아 어떤 형식으로든 제도화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최소한 사실상 제도가 묵인하는 형식으로,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논란을 피할 수 있는 변형된 형식으로 정착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상상력을 비약시키면서까지 다소간 무리하게 아동납치를 풀어본 것이지만, 아동납치는 보통사람들의 도덕 내지는 윤리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엄연한 현실이다. 작가 강민수의 회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일 유학시절 그는 당시 독일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납치 사건에 주목하고 그 사건을 그림 속에 담았다. 

그림 속에는 아이들이 서성거린다. 아이들은 저마다 일련의 넘버를 달고 있는데, 아이들이 실종된 기일이다. 이렇게 실종된 아이들 중 일부는 운 좋게도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렇게 불운한 아이들은 언론의 이슈와 함께 잠시 부각되다가 이슈가 시들해지면서 덩달아 잊히고 만다. 그렇게 사라지고 잊힌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실종 이후 여백으로 남겨진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되고, 가정법으로 물어질 수밖에 없는 그 빈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운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실종되었다는 사실 뿐,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림은 온통 애매하고 모호하다. 심지어는, 아니 오히려 당연히 실종된 주체인 아이 자신마저도. 여기서 작가는 실종된 아이 자신이 된다. 실종된 아이에게 자기감정을 투사하고, 아이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정황을 읽고 사태를 냄새 맡는다. 

그 정황과 사태와 더불어 아이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온통 애매하고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심정적으로 이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기억 속으로 숨는 일이다. 그래서 온통 회흑색의 희뿌연 현재 속에서 오로지 과거로부터 호출된 것들만이, 기억 속으로 불려나온 것들만이 컬러를 덧입고 그 실체가 오롯하다. 이를테면 공놀이와 인형놀이, 누이와 함께 회전목마며 스카이콩콩을 타고 놀던 일, 공연관람이나 동물원 방문, 그리고 거실의 소파와 같은 기억의 조각난 파편들이다. 그리고 미처 도래하지 않은 미래 역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므로 누구도 침범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는 불모의 대지에 다만 헐벗은 나무가 자랄 뿐인 삭막한 현실의 자장 속에 풍선놀이를 불러들인다. 적어도 알록달록한 풍선들을 눈앞에 그리는 순간만큼은 하늘을 꿈꿀 수가 있고 현실을 잊을 수가 있다. 기억을 매개로 과거를 호출하고, 상상력과 더불어 꿈을 꾼다. 이 모든 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현실적 공간과 아이의 상상력이 만든 가상공간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된 이중 공간이 흡사 무대 같다. 아이는 무대에 드리워진 붉은 벨벳 소재의 커튼을 젖혀보지만 그 뒤편에는 다만 벽으로 가로막혀있을 뿐이다. 무대에는 엄마가 등장하는데, 그러나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팔은 흡사 황금 마네킹처럼 온기가 없고 싸늘하다. 공간은 아이가 처한 상황인식에 따라서, 그리고 그 상황인식에다 덧붙이고 각색한 여하에 따라서 무대로, 실내로, 야외로, 야외로 연장된 인공적인 장소로, 그리고 고립된 섬으로 각각 변주된다. 어떻게 변주되든 그렇게 변주된 공간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다. 낯설고 이질적이다. 마치 실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양(인정하기 싫은 현실인 양)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도 실감나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처럼 실감나지 않는 공간을 연출하는데, 일명 퍼티라고 부르는 건축용 소재를 사용해 회흑색의 칙칙한 느낌의, 거칠고 황량한 느낌의, 쓸쓸하고 폭력적인 느낌의 이율배반적인 정서적 효과를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가 불러낸 기억의 편린들을 덧붙여 애매함과 모호함을 부각한다. 이 모든 일들(아이가 맞닥트렸을)이나 정서적인 느낌(아이가 느꼈을)은 물론 아이가 아닌 작가가 상상한 것이다(그리고 여기에 필자의 상상이 덧붙여진다). 상상력이 아닌,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얼마 되지가 않는다. 이를테면 아이의 죽은 사체가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 보도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놀이터 정도. 

이따금씩 화면에는 인형들이 사라지고 없는 아이들을 대신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형에 내포된 의미는 이중적이고 중의적이다(사실 이중성은 작가의 그림에 있어서 본질적인데, 애매함과 모호함의 원인이면서, 이로써 특유의 서정적 아우라가 유래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인형은 아이들의 친구(사실상 살아있는 장난감)이면서 어른의 친구(사물화되고 도구화된 장난감)이기도 하다. 어른과 놀기 위해서 아이는 마치 인형처럼 사물화돼야 하고, 어른과 잘 놀기 위해서 아이는 기꺼이 도구화돼야 한다. 마구 쑤시고 찌르고 버려도 되는 사랑스런 페티시가 돼줘야 한다. 발가벗겨진, 때론 에로티시즘을 연상시키는 포즈를 떠올리게 하는 무표정한 표정의 인형들이 이런 사물화와 도구화로 인해 마치 살아 있는 듯(혹 죽은 듯?) 쓸쓸하고 안쓰럽고 섬뜩하고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하고 무감하고 무심하다. 



 

작가는 이로부터 부재라는 주제의식을 캐낸다. 부재는 각각 부재하는(사라진) 아이들, 부재하는(과거지사가 된) 역사적 사건, 그리고 부재하는(상실된) 고향(혹은 고향의식)으로 변주되고 심화되고 확장된다. 

역사적 사건으로는 주로 일간지 신문에 실린 보도사진을 차용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독일 현지의 테러 사건과,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독일의 유명 갤러리를 방문한 일, 그리고 고 다이애나 비가 행사장에서 왈츠를 추는 보도사진 장면 등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미디어의 보도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가를 묻는다. 결론적으로 그 답은 회의적이다. 특히 테러 사건처럼 국가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경우에 미디어의 입장은 편향적이기 쉽다. 그 일방적인 입장과 더불어 정작 테러 주체의 입장은 삭제되고 거세된다. 여기서 작가의 코멘트는 바로 그 부재하는 장소 곧 테러 주체의 입장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독일 일간지에 실린 사진 곧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갤러리 현관을 나서는 장면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십중팔구 방독 기간 중 하고많은 행사와 일정과 방문 스케줄이 있었을 것이고 그 때마다 이를 기록한 사진들이 있었을 터인데, 유독 이 한 장의 사진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무엇을 홍보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분히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해보이지는 않는 이 한 장의 보도사진에서 언론의 실체는 객관의 얼굴을 한 프로파간다였음이 드러난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내포된 부재하는 장소는 바로 그 홍보이며, 프로파간다였던 것이다(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롤랑 바르트의 신화의 개념에 연결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문화적 사실이나 이데올로기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리고 왈츠를 추는 다이애나 비와 파파라치에 의한 사고로 명을 달리한 다이애나 비 간에 무슨 필연적인, 혹은 최소한 암시적인 상관이 있는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다이애나 비의 사진이 어떤 전조를 품고 있는가. 나아가 실제로 이 사진이 사고를 보도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면 그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가(그 의도에 대해선 알 만 하지만, 여하튼). 이처럼 한 장의 사진에 내포된 의미는 설핏 명명백백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실들이 미처 말해지지 않은 채 봉해져 있고, 그렇게 허다한 부재하는 장소들(드러나지 않은, 잠재된 의미의 장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보도사진을 테마로 한 작가의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그 부재하는 의미의 장소들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부재는 일종의 상실감으로 나타난다. 부재 자체가 이미 일정정도 상실감 곧 상실된 것에 대한 자기반성적 반응과 감정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근작에서 그 개념은 상대적으로 더 보편적이고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성격을 띤다. 일종의 고향의식 내지는 원형의식을 주제화한 것인데, 여기서 고향은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 개념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심리적 사실로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결여의식 내지는 결핍의식 같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존재론적 그리움과 같은. 

여기서도 작가는 역시 오랜 흑백사진을 테마로 그리는데, 아마도 친구지간일 듯싶은 여성들의 이미지며(모친의 처녀시절 사진?), 가족사진일 듯싶은 이미지들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려진 것 같은 사진 속 이미지들이 개인사적이고(그래서 더 내밀하거나 친밀하고) 기념비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마치 부재하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을 보는 것 같고, 그리움의 원형적 이미지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근작에서의 이미지 자체만 놓고 보면, 왠지 그 이미지가 사라진 아이들과도 통한다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사라진 어른들? 사라진 아이들이 성장한 모습? 더욱이 모든 어른들은 저마다 사라진 시절을 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그렇게 사라진 시절? 아마도 사진이나 이미지 고유의 모호성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했는데, 부재 자체와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모호한 기호가 바로 죽음과 통한다. 

여하튼 작가의 작업은 외적으로 서로 분기되는 지점들, 이를테면 사라진 아이들, 보도사진 속에서 증발된(혹은 왜곡된) 의미들, 그리고 원형적 이미지를 다루고는 있지만 이 낱낱의 지점들은 서로 분리된다기보다는 순환적으로 연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 밑바닥에서 부재하는 것들, 상실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그래서 더 큰 그리움으로 와 닿는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를 공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