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박영

이주형Rhee, JooHyeong

Portrait 2 Oil on canvas 162 X 130 2011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판화전공 / 수료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서양화전공 / 졸업 (M.F.A)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 졸업 (B.F.A)

전시 경력
<개인전>
2013 <일요일, 눈부시게 빛나는 죄의 날>, 쿤스트독, 서울
2012 <습지, 또 다른>, 63스카이아트 미술관, 서울
2012 <습지>, 갤러리가비, 서울
2010 <공리적 풍경 (내일의 작가 선정전)>, 성곡미술관, 서울
2010 , 갤러리박영, 파주
2009 <포자>, The Void gallery & Lost room
2008 ,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2006 , 서울대 문화관, 서울
2006 <무정의술어>, The SPOT, 서울
2004 , 알파갤러리, 서울
<단체전>
2013 <한국현대회화 30인>, 강동아트센터, 서울
2012 <감각의 위치>, 쿤스트독, 서울
2012 , 충무로 영상센터 오재미동 갤러리, 서울
2011 , 갤러리 박영, 파주
2011 <21세기 풍경 : Emptiness>, 성곡미술관, 서울
2011 <이 작가를 추천한다 31>, 갤러리 숲, 서울
2011 , 갤러리 박영, 파주
2011 , UNC gallery, 서울
2010 , Tomorrow city 송도, 인천
2010 <직관>, 갤러리 학고재, 서울
2010 <서교육십 2010>, 갤러리 상상마당, 서울
이하 생략

기타
2013~2015  777레지던스 입주작가
2012, 2010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 기금 지원작가 선정
2010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선정
2009~2011  박영레지던시 입주작가

작품소장
63스카이아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아트뱅크
성곡미술관

essay

경작에서 사유로, 사유에서 노는 것으로 - 이관훈 (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이주형과 짧은 만남과 대화를 가졌다. 물론 이 만남은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생각 그리고 두 사람이 지닌 태()의 가치관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다. 필자가 작가들의 작업실에 들러서 습관상 먼저 하는 행동은 작품보다 개인적 스토리나 심리를 알 수 있는 사물들 그리고 재료, 도구, , 공간배치 등 그들의 살림살이를 (실례를 무릅쓰고) 들춰보는 것이다. 마치 고고학자나 콜롬보형사처럼 물감을 어갠 흔적이나 붓과 기타 재료의 쓰임새와 수량 등등 사물의 모양과 곳곳에 묻어난 흔적들을 채취 하듯 살펴본다. 작업실을 고유의 자기성역으로 간주하여 탐방을 꺼려하거나 집을 작업실처럼 혹은 작업실 없이 창작하는 작가들의 경우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유추해내거나 대화를 통해 실마리를 찾는다.

작품이란 모름지기 작가의 태도(인문학적 직관과 취향, 몸짓, 냄새 ... )의 잔영들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 그래서 그 작가를 알려면 오랜 시간을 두고 연애하듯 많은 교감을 나눠야 한다. 하루의 켜(레이어)가 쌓여 일상의 흔적으로 남고 그 흔적들을 개개의 작가들이 편재한 시나리오 속에서 쓰고-고치고-편집하는방식으로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결과물이 나온다. 이러한 모든 작품들은 삶의 프레임(영역)을 통해 미술의 프레임을 들여다보는 개인의 역사쓰기를 하는 것이라 하겠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이주형 작가의 면모를 알기에는 어려웠다.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을 대략 직감적으로 추측되고 생각되는 몇 가지 단서를 짚어본다. 이번에 쓴 짧은 글이 이주형과 그 작업에 대한 진정성에 접근이 가능할까? 예술이 추상적이듯이 작품에 대한 글도 추상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초점에 빗나가는 허용범위가 넓다는 것에 위안을 둔다.

 

섬에서의 사유와 자유_경작하다

포자 시리즈 작품들은 마치 섬과 같다. 이주형에게 섬은 입구, 출구가 없는 곳이다. 폐쇄된 독립 그 자체다. 그 속에서 꿈을 키우며 산다. 땅을 갈아 농사를 짓듯 그 곳에서 홀로 경작을 하며, ‘-문자를 쓰며, 노래도 부르고 온갖 짓을 해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다. 떨어지고 추락하는 맛을 보다 단절로 인도되는 길이 섬이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사유를 하며 자유를 만끽 한다. 그 섬을 자유자재로 대지미술로 만들었다가, 쓸 수 없는 가면으로 위장하다가, 무형의 변이체로 때로는 숲의 정원을 만들기도 한다.

세상은 보지 못한 것을 찾는 자에게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가 설정해 놓은 섬은 사색과 사유를 끝도 없이 지속하기 위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중력도 없는 사색 공간. 밭을 경작한 바탕(=그림)에 그는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빛을 소이며 길을 내고 집을 짓고 하는 일을 회화적으로 수행한다. 끝없이.

두려움

여러 감정들 중 두려움은 이주형에게 상당한 가치를 둔다. 정신적인 모티브로 작용하여 새로운 창작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세상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두려움이 어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데, 특히 그의 두려움은 자아와 사회의 사이에서 관점의 차이에 의해 느끼는 공포감이 컸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극한 지점까지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상황이든지 사람의 감정 끝은 머리끝으로 올라간다. 신체의 모든 것들은 성인이 되면 성장을 멈추지만 외부로 드러난 이미지에서는 머리카락이 계속 성장을 하고 있다.

사람의 신체에서 끝(발바닥)과 끝(머리, 머리카락)은 서 있거나 움직일 때는 종횡이면서 누워있거나 잠잘 때 죽음을 임할 때에는 수평적이 된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은 서로 다르다. 발바닥은 바닥과 많은 마찰을 시키며 몸을 의지하지만 또 다른 끝은 다양한 곳에 시선을 두며 관계를 설정한다. 한 몸이면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는 각각에 책임과 역할을 부여한다. 이 두 관계가 수평적으로 작용할 때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주형은 방법을 찾는 과정에 있다. 시선의 움직임과 태도가 보여 진다.

 

두터운 껍질과 환영_문자를 쓰다

이주형은 스스로 구현해 놓은 바탕(원형질) 위에 문자를 쓴다. 아니 그린다. 자기만이 해독 가득한 상형 문자를 바깥이 아닌 자기영역 안에서 지독하게 집요하게 노동을 집중하며 만들어나간다. 한 획, 두 획을 그리며 세 번 일곱 번의 리듬으로 호흡을 가다듬어, 해석 할 수 없는 오독과 편견의 길로 독자적인 언어를 형성했다. 이 비밀스런 은밀한 문자를 바깥 세상에 흩어진 사물과 자연적 현상들과 관계를 지어본다. , 숯덩이, , 인조머리카락, 먹구름, 양탄자, 원형질, 가면, 텃밭, 모호성, 자궁, 덩어리, 늪 등이 연상된다. 모두 우리들과 붙어있거나 응시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현 세계에서 무형의 공간이자 사색을 탐할 수 있는 공간, 즉 길바닥이나 벽면의 흠집난 작은 구멍에서부터 빈 공터, 골목길, 화장실, 창문너머, 공사장, 복도, 밤풍경, 면벽(面壁), 버려진 오브제와 발견된 오브제, 잡초, 어떤 흔적들, 잠자기 전의 틈새, 책의 앞뒤 간지, , ‘글과 글글과 이미지사이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을 그 대상들과 이접(移接)과 교접(交接)을 통해 경우의 수를 늘려간다면 또 다른 문자의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비주얼의 옆면

이주형 작품은 비주얼하다. 그러면 추상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그것은 너무나 실제적인 조건이다. 그의 그림처럼, 그는 밖에서 보면 은폐된 최소한의 움직임과 사각 틀의 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이 만들어놓고 자위하는 생채기의 찌꺼기들과 같이 자기 상처를 낸다. 그 행위는 (그림을)그리지 않을 때 자책감에 시달리는 현상, 실제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그가 빠져 있는 시커먼 포자 덩어리를 어떻게 볼까? 필자가 관객과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 비주얼의 측면 즉 여백의 행간을 본다. 작가는 하얀 여백이 별 필요가 없고 들어갈 이유도 그릴 이유도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여백 공간은 무의식 상황을 은유 한 것으로 작가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관객이 읽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어두운 세계의 반전을 타자 입장에서는 접근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가 의식하지 않았던 그 여백 공간에서 위 단락 끝에 열거한 언어들의 현상들을 유추해본다면 수많은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주형에게 주어진 작품의 무게

예술가들에게 작품의 무게는 물질성과 상대성을 갖는다고 판단한다. 물질보다는 정신을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기 때문에 작품(정신적인 생산물)이 깊어지고 많아지면 두려움보다는 긍정적인 지혜와 상상적인 힘이 생겨난다. 그래서 시간의 켜가 거듭될수록 작품은 많아지고 몸은 가벼워진다.

이주형은 어떤 위치일까? 작품이 지닌 중력은 어느 정도 일까? 인생의 무게를 잴 수 없듯 작품의 무게도 잴 수 없다. 이제 막 불혹에 들어설 그는 복잡한 사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지으며 세상을 지탱할 수 있는 무게를 갖는다. 지식의 무게보다는 예술적 직관의 무게가 더 앞선다고 본다.

불혹의 나이에는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 그리고 사고의 무게, 일의 무게, 관계의 무게, 가르침의 무게, 반복의 무게 등을 짊어지고 간다. 솔직히 이 나이에는 두려울 게 없다. 청춘과는 다른 인생의 전환점 즉 중도를 알 시점이다.

 

이주형의 작품세계를 알아가는 단계에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짧은 단상들을 써 보았다. 그의 나이처럼 작업 또한 중간 지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