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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중의 작업

 

글|하계훈 (미술평론가)

작가 김태중의 작품은 형식상으로 서양미술사 속의 팝아트 계열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2001년부터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최근 작품에서 캔버스나 오브제에 형광색의 밝은 아크릴 물감을 가지고 재미있는 이미지들을 화면 가득히 그려 넣고 있다. 작품의 속성상 그의 작품은 젊은 관객층으로부터 폭넓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호평을 받았는데, 평면이나 입체 뿐 아니라 운동화와 티셔츠 같은 생활용품에도 그의 이미지들이 적용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한때는 붓을 내려놓고 여행과 자동차 조립에 빠져 지내기도 하였으며 친구가 준비하는 카페의 인테리어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예술창작 작업으로부터의 이러한 일탈은 작가로서의 예술적 역량을 재충전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작가에게 여행은 창작의 영감을 충전하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권고되어야 하는 활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제 캔버스 앞으로 다시 돌아온 작가는 한 차원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파주의 박영 스튜디오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작업에 몰두하여왔다.
김태중 작가의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즐겁고 밝은 무드를 바탕에 깔고 있으며 그 위에 작가가 이미지들을 구축해나가면서 환상적이면서 의미 있는 내러티브를 구성해나가는 형식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그렇지만 그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심오한 해석과 의미부여를 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를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주제를 형성하는 사변적 요소들을 전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회화의 근원이나 종교의 의미 등에 대한 숙고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예술관과 인생관을 화면에 정리하는 셈이지만 불필요하게 거창한 철학적 의미나 예술적 담론을 작품 속에 직설적으로 담아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작가 김태중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서양의 낙서화나 그래피티가 떠오르기도 한다. 실제로 그래피티의 속성 가운데 몇몇 요소들이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지만 김태중의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한 화면 속에 그래피티보다 조직적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으며 절제되고 숙성된 사고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고, 작가가 예술과 삶에 있어서 밝고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작품 속에 담긴 이러한 내용을 서양적 표현형식을 빌어 동양적인 주제로 번안하여 개성적으로 잘 소화해내고 있다.
김태중이 관심을 갖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원시성이다. 여기서의 원시성이란 미성숙이나 미발달의 의미가 아니라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시성을 말한다.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도 결국 모든 변화와 변증법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원시적 근원으로 회귀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근본적인 것으로서 김태중이 선택하는 화두로는 종교와 사랑을 꼽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그의 작품 속에서 밝은 색의 선묘와 구체적인 이미지나 문자로 드러난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동물과 사람이 결합된 형식의 이미지와 마음 심(心)자, 그리고 쌍커플이 짙게 파인 부릅뜬 눈에서 눈물인 듯한 형상이 뚝뚝 떨어지는 표현 등에는 작가가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의 종교를 두루 거치면서 이끌어낸 일원론적인 사고와 불교의 윤회적 사상이 담겨있다.
누군가가 언급했듯이 김태중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단순한 비쥬얼 아티스트라는 명칭 이외에 멀티플아티스트, 가구 디자이너, 클럽 DJ 등 다양한 이름이 주어진다. 그만큼 작가 김태중은 다양한 방면에 관심과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관심의 다양성이 시각예술 분야에서의 작가의 활동에 도움이 될 지, 아니면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만들지에 대해서는 양립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작가 자신이 창작행위에 대해 어떠한 태도와 각오로 임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앞으로 김태중이 전개할 예술적 행보를 지켜보면 그 해답이 나올 것이다.


이진준의 작업

글|하계훈 (미술평론가)

작가 이진준은 시각예술의 장르를 폭넓게 넘나들며 다양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영상을 바탕으로 하는 설치작품을 위주로 작업하는 작가 이진준은 우리 삶의 다양한 현상의 저변에 깔려있는 역사적, 사회적 함의를 관람자들에게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는 예술을 매개로 사회 구성원 사이의 교류를 유도하며, 삶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과 상처에 대한 치유의 희망을 모색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함께 예술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개념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경력을 살펴 볼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특이함은 그가 경영학을 전공한 뒤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였다는 사실과 공중파 방송국의 PD로 활동했던 사실이다. 이러한 경력은 당연히 많은 질문을 유발했으며, 여기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운명론적 선택을 가미하여 개인적인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주로 장르나 전공의 구분을 넘어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보다 구조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는 자기 소개서에서 스스로를 ‘미디어 퍼포먼스 연출가 및 미디어 아트 설치 미술가’로 적어놓고 있다. 그만큼 그는 다양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2004년의 전시에서부터 이진준의 예술적 행적을 추적해보면 그는 강남의 스페이스 C 코리아나 미술관에서 환상적인 형태의 대형 벽화작업을 했었고, 이듬해에는 이재욱과 함께 강남에 있는 세오 갤러리의 건물 안과 밖의 외부공간을 연결하는 계단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공간에 벽화작업을 했다. 이때 두 작가가 구성한 벽화는 정적인 위치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움직이면서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 물리적 공간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3차원의 조각 감상법을 넘어 연속된 시각적 잔상효과와 시간성에 중점을 두는 공간으로 표현되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벽면에 몬드리안 작품처럼 수직과 수평의 선을 교차시켜 실제 공간보다 확장된 환영공간을 만들며, 관람객들이 공간을 지나가는 과정을 통해 마치 비디오 작품을 보듯이 착시적 경험을 하며 유희적 참여를 통해 연속되는 시각적 경험을 뇌리에 남기도록 공간을 구성하였다.
2006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스튜디오의 작가 레지던시에 참가하였으며 2007년 에는 아르코 미술관에서 작가 한 사람당 8주 동안 미술관 전시실을 임대해주어서 자유롭게 작업하면서 창작과정을 관람객과 공유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이진준의 ART Theatre-영상설치 개인전 역할놀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6회에 걸쳐 실험적 연극의 형식으로 예술의 경계를 실험하는 일종의 연출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무대와 관객석 그리고 현실과 연극의 구분이 없이 연출된 여섯 번의 일인극 모노드라마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일탈과 카타르시스, 소외와 고독을 관객들과 공유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이 모든 것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편집하여 보관하였다.
이러한 영상작업과 연출 작업을 하는 동안에 작가는 또 다른 작업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2007년에 제작한 의 경우에는 작가가 각 나라의 동일한 공간에서 알파벳 문양을 찾아내서 사진으로 채집, 기록하고 그 알파벳을 이용하여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가는 프로젝트였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컴퓨터와 영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눈에 이미지를 기호로 읽는 인식 시스템을 작동시키며 새로운 시각적 재미와 자극을 던져준다.
스튜디오 박영에 입주해있는 동안 작가 이진준은 국제적으로 여러 행사에 참가하면서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2008년에는 서울 디지털미디어시티 미디어 설치 예술품 국제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여 상암동에 대형 설치작품을 세워놓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문화재단에서 공모한 NART2009 젊은 예술가 지원사업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작가 스스로가 자신을 명명하고 있는 것처럼 이진준은 미디어 아트를 바탕으로 공공의 공간에서 관람객과의 소통을 위한 설치미술을 제작하는 작가이기도 하며 연극형식의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과의 소통가능성을 실험하는 연출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매체의 형식보다는 개념을 중시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저변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현상에 대한 감수성의 촉수를 무디게 내버려두지 않으면서 끈임 없이 사회를 관찰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메시지를 가지고 관람객과 교감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지현의 작업 : 책 오브제, 책의 아우라와 시대정신의 표상

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지금까지 작가 이지현의 작업은 대략 신문 작업, 한지 작업(여러 겹의 한지를 포개 바느질로 고정시킨 연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려 안료가 그 이면에까지 스며들게 한), 책 작업, 사진 작업으로 대별된다. 그 종류가 다를 뿐 하나같이 종이를 소재로 한 작업들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그리기보다는 만들기에 주력해왔으며, 이는 그대로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정성에 대해서 말해준다.
즉 작가는 이 종이 소재들을 흔히 그렇듯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기 위한 바탕재로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을 파쇄해 형질을 변질시키는 것(이를테면 일종의 종이죽을 만들어 저부조 형태로 떠내는)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가하면 이 소재들은 동시에 매체들이기도 한데, 그 매체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것도 관심 밖이다. 이를테면 신문에 내장된 일상성 담론과 사회학적 의미, 한지 고유의 물성(예외적으로 작가의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본격적이지는 않은), 책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과 이해, 그리고 사진과 관련한 다큐멘터리와 가상적 리얼리티의 경계에 대한 인식 등등.
종이의 형질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매체적 특수성(아마도 일종의 개념미술로 나타날 만한)에도 붙잡히지 않는 어떤 지점, 자기가 둥지를 틀 만한 어떤 지점을 찾아냈는데, 철저한 수작업을 통한 공작성이 그것이다. 작가에게 수작업은 작업에 투자되어야 할 당연한 노동(물론 감각적 노동)으로서, 그 노동으로 인해 작업은 비로소 작업으로서의 당위성을 부여받게 된다. 작업이 종이의 형질을 보존하면서 진행되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 매체적 특수성(이를테면 의미론적인 성질)도 함께 보장해주지만, 그러나 그 특수성은 공작성의 과정으로 인해 상당할 정도로 상쇄된다. 소재 고유의 형질(이를테면 종이)과 매체적 특수성(이를테면 신문과 잡지)과의 경계 위에,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애매한 지점 위에 작업이 세팅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지 작업의 예외성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작업은 결국 신문작업과 책 작업, 그리고 사진작업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이 일련의 작업들은 재차 그 방법론에 의해 전작의 신문작업(붙이기)으로, 그리고 이후의 책 작업과 사진작업(뜯기)으로 묶여질 수가 있다.

신문작업. 작가는 전작에서 신문을 소재로서 차용한다. 신문을 잘게 오려 좁고 긴 띠를 만든 다음, 캔버스 화면을 버팀대 삼아 그 표면에 직각으로 붙여 세운다. 이 일련의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실내와 같은 일상적인 정경을 재구성하는데, 그 섬세한 세부와 치열함이 거의 편집증적인 수준을 보여준다. 흡사 빽빽한 미로처럼 서 있는 자잘한 칸막이들이 어우러져 의자가 되고 화분이 되고 커튼이 되고 책장이 된다. 여기에 그림자가 가세해 사물성을 강조하는 한편, 현실공간의 재현과 추상성(흑백 모노톤의 화면이 이런 추상성을 강화한다)과의 경계를 애매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디테일한 세부가 일종의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마치 화면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일루전적 효과와 함께 일종의 유사 입체감(혹은 공간감)을 자아낸다.
이런 일상공간의 재현과 공간감은 외관상 신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갖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작가의 작업에서 신문의 의미론적 특정성이 완전히 무의미해진다고는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코에 닿을 듯 가까이서 화면을 보면 이런 일루전(멀리서 볼 때 보이는)은 사라지고 신문에 실린 기사의 편린들이 보이는데, 일관된 맥락 속에서보다는 그 맥락이 해체되고 분절되고 뒤죽박죽으로 재조합된 상태의 조각난 기사들이 보인다. 현실공간을 재구성하면서 덩달아 신문에 실린 기사를 함께 재구성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멀리서 보면 허구적 공간(재현 공간)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파편화된 일상(엄밀하게는 일상의 정보)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뒤죽박죽된 기사 조각이 정보와 의미의 불확실성(미디어를 통한 정보와 의미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에 대한 메타포처럼 읽힌다.
그리고 신문작업에서 확인되는 이런 긴장감, 이를테면 조형적인 프로세스와 신문의 의미론적 특정성과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그 소재와 방법론을 달리해 또 다른 형태로 변주 심화된다.

책 작업과 사진 작업. 작가는 근작에서 책과 사진을 소재로서 차용하는데, 책의 낱장이나 사진의 표면을 뜯어내고 이를 다시 재구성하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가늘고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책의 표면을 낱낱의 조각들로 해체한 연후에 이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때 작가의 개인사 내지는 역사의식 내지는 특정의 주제와 유관한 책을, 새 책보다는 오래된 책을, 그리고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책을 선택한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국어, 국사, 도덕 같은 교과서로 작업을 시작해, 이후 점차 작가 자신과 같은 세대의 시간의 흔적을 내장하고 있는 60,70년대 서적이 주로 차용된다.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책들이며, 작가의 개인사를 넘어 세대의 공통이념과 가치관을 엿보게 해주는 정전들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성경, 악보, 사전, 그리고 오래된 잡지 등이 선택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백남준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라이프지, 톨스토이의 <부활>, 박경리의 <토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섹스피어의 희곡집, 반 고흐의 도록, 마릴린 몬로의 초상 사진 등등.
그리고 이따금씩 책 작업은 일종의 도서관 프로젝트의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도서관의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의 정경을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 정보를 포토샵으로 작업해 주제별 라이브러리(이를테면 역사학, 인류학 등등)로 재편집한 사진을 소재로 작업한 것이다.
책이든 사진이든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포인트는 책의 활자 부분과 사진 이미지를 자잘한 조각조각들로 일일이 뜯어내는 일이며, 때로는 그렇게 뜯어낸 조각들을 조심스레 올려붙여 원형 그대로를 복원하는 일이다. 비록 원형 그대로를 복원했다고는 하나 그 자체가 원본과 같을 수는 없으며, 때로 작가는 부분 이미지를 복원하지 않은 채 내버려둬 오히려 자연스런 느낌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이로써 원본에는 없는 어떤 질감이 생겨나고, 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흐릿하고 모호해진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원본의 원형(원본성)을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원본의 이미지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며, 이는 그대로 책과 사진의 의미내용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내부로부터(아마도 진즉에 책이나 사진 속에 이미 내장돼 있었을)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을 표출시키려는 기획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활자와 이미지의 실체를 겨우 식별할 정도로까지 해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의미내용의 담지체를 물질적이고 질료적인 차원으로, 시각적 기호를 촉각적 기호로 그 존재론적 층위를 전이시켜놓고 있다고나 할까. 찢고 붙이기, 해체와 구축이 교차하는 과정을 통해서 책 본래의 원형을 해체하고 고유의 의미내용을 비워내 한갓 기호화된 사물(익명적인 책 오브제)로 그 정체성을 전복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책 속에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작가만의 책읽기에 비유할 수 있을 듯싶다.

책은 시공을 초월한 시대정신의 표상이다. 이런 책을 한 땀 한 땀 해체하듯 뜯어내는 행위야말로 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책과 감각적으로 만나지는 경험)이며, 이를 재차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과정은 책이 새로운 이미지로 재생되는 계기가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의 기록일 수 있으며, 나아가 활자나 이미지를 뜯어낼 때 생기는 보푸라기 같은 부유하는 이미지(모호한 이미지)는 곧 정체성을 상실한 채 부유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암시한다. 표면적으로 원본의 의미맥락을 해체해 익명적인 책 오브제로 그 정체성을 변질시키는 작가의 작업은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이처럼 정체성 상실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단면을 표상(그 자체 시대정신의 표상이기도 한)하고 있는 것이다.

최진아의 작업 : 의미의 재구성과 쾌락적인 독서


글|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의미의 재구성.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읽는다. 저마다 인문학적 소양과 배경과 수준이 다르고, 그 다른 관점으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저자의 텍스트는 독자의 독서행위에 의해 그 의미가 변질되는데, 독자의 인문학적 지평과 저자의 인문학적 지평이 융합되기도 하며, 나아가 독자는 아예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텍스트를 읽기조차 한다. 이 읽기과정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 소위 열린 텍스트며, 하이퍼텍스트 개념이다.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저자의 죽음 논의가 설득력을 얻는다. 즉 텍스트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지점을 저자가 아닌 독자로 본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때의 독자를 능동적인 독자, 적극적인 독자, 쾌락적인 독자라고 부른다. 특히 쾌락적인 독자는 바르트의 핵심개념으로서, 기왕의 텍스트에 침투하고 간섭하고 덧대고 부풀리고 해체해 그 의미를 변질시키는 것이다(혀, 텍스트를 맛본다).
최진아는 멀쩡한 책의 활자를 해체해 재구성한다. 구와 절을 분절시켜(칼로 오려내)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일종의 책 오브제를 만드는 것). 이와 함께 조사와 명사 등 특정 부분을 칼로 오려 내거나 지워(삭제해) 텍스트 속에 일종의 여백(독자가 텍스트 속에 끼어들어 상호간섭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여지와 그 흔적)을 만든다. 이렇게 재구성되거나 삭제된 텍스트는 맥락을 잃고 문법을 잃어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변질되는데, 이로써 작가는 맥락과 문법의 문제를 건드린다. 즉 맥락이란 텍스트 자체의 구성원리라기보다는(텍스트에 내장된 요소나 성질) 그 텍스트가 맞닥트리는 외적상황(외재적 관계)에 연유한 것이며, 문법 또한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공의 소산인 만큼(문법은 체계 내지는 시스템의 문제) 근본적으론 재구성되고 재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간섭에 의해 재구성되거나 부분이 삭제된 텍스트는 읽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맥락과 다른 문법을 부여받아 그 의미가 재가동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하나의 텍스트가 독자의 능동적인 독서행위(독자는 텍스트 속으로 들어간다)에 의해 재가동되는 과정을,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론 텍스트를 자기화하는 과정(특히 텍스트를 분절시켜 하나의 좁고 긴 띠로 연결한 것을 캡슐에 넣어 밀봉한 오브제 작업에서 극명해지는)을 보여준다.

사전, 죽은 언어와 의미의 집.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존재를 재구성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전적 언어와 의미로 존재는 낱낱이 재구성될 수가 있을까. 언어란 세계의 현상을 옮겨놓은 기호이며, 사전은 그 기호를 집적시켜 놓은 가상의 집이다. 그런데 사전은 그 기호의 온전한 집일 수가 있을까. 기호는 의미에 대해 열려 있으려하고, 사전은 그 의미를 닫으려한다. 이로써 기호와 사전의 동거는 불완전해진다. 사전 속엔 수많은 의미들이 담겨있지만, 객관적 사실과 뻔한 사실(예컨대 지시적 의미와 같은)에 대해선 강하지만, 주관적 사실과 생리적 사실 그리고 특히나 가치론적 사실에 대해선 취약하다. 주관적 사실과 생리적 사실 그리고 가치론적인 사실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지는 경험의 종류와 질과 강도 여하에 따라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전이 가리켜준 사실을 결정적이고 보편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는데, 그것이 합리와 상식 그리고 선입견과 편견의 지평을 이룬다. 그리고 그 규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사실은 저절로 불합리와 비상식으로 치부된다. 자기소외와 같은 존재론적 문제, 그리고 왕따와 같은 사회적 소외 문제가 이 지점으로부터 파생된다. 작가의 그림에는 자기 외부의 정황을 볼 수 없을 만큼 고깔을 깊이 눌러쓴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렇듯 정통성을 부여받은 합리와 상식에 대한 맹신을 암시하며, 도무지 타자성과 차이성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맹목을 상징한다. 그리고 곧잘 그 맹신과 맹목은 타자를 공격하고 공박하는 무기로 변질되기도 한다(삿대질하는 말).
이런 사전적 의미에 대해 작가는 몸의 언어(두뇌를 중심으로 그 가장자리에 그려진 혀, 수정체, 나팔관, 오므린 입, 열린 기도, 지시하는 손가락, 그리고 교감하는 눈)를 그 대안으로서 제시하고, 의미란 것이 타자성과 차이성을 아우르는 것(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의미, 이접과 연접)으로부터 비로소 파생되는 것임을 제안한다.

사물의 이름, 페티시즘.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지층과 계급지층이 상호 긴밀하게 연동돼 있다고 한다(문화계급론). 엘리트 계급이 향유하는 문화가 다르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향수하는 문화가 다르다고 본 것이다. 이런 다른 문화적 지층으로 인해 그들은 저마다 고유의 언어를 발전시키는데, 은어, 비어, 속어가 그것이다(따지고 보면 표준어 역시 처음에는 이런 하위문화 언어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았다). 똑같은 세계와 현상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체계가 다른 것이다(이쯤 되면 거의 외국인 내지는 이방인 수준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 다름은 단순한 언어의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대면하고 대응하는 관점과 의식의 보다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차이로까지 확대 재생산된다. 그렇게 한 계급은 다른 계급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한 계급의 의식과 관점과 가치관은 다른 계급의 경계 너머로까지 건네지지 못한다. 다만 저마다 고립된 하위문화의 섬들로써 소외될 뿐이다. 이렇게 여피족은 도회적 감성을 대변해줄 언어체계를 정교화하며, 오타쿠족은 고유의 반항의식을 세련되게 표현해줄 언어체계를 발전시키며, 또한 명품족은 명품과 관련된 언어체계를 그러모은다. 언어체계가 코드, 모드, 매너로 굳어지는 것이며, 작가의 그림(특히 사진콜라주 작업)은 이처럼 사물화된 의식에 갇혀 소외된 개인을 보여준다.

시인에 대한 오마주. 최진아는 샤를 보들레르, 괴테, 랭보, T.S 엘리엇과 같은 작가들의 저작에 등장하는 각종 텍스트를 화면에 오려 붙여 일정한 패턴을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 장기를 그려 중첩시킨다. 여기서 장기로 차용된 뇌와 심장은 각각 시인의 이성과 감성, 에토스와 파토스를 상징하며, 시 혹은 시인의 원천이며 근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작가는 텍스트가 화면의 중심에 그려진 뇌와 심장을 향하게끔 방사형으로 배치하는 한편, 가장자리를 어둡게 하고 중심 부위를 밝게 처리한다. 이로써 흡사 뇌와 심장으로부터 빛이 발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를테면 뇌와 심장에다 후광 내지는 광휘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주지하다시피 후광 곧 님부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종교화(종교적 아이콘)에서 성자와 같은 신령스런 존재의 머리 부위를 감싸는 전형적인 기호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작가는 결국 시인의 정신(뇌)과 감성(심장)에 대해 거의 종교적 아이콘을 대할 때와 같은 경외감을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며, 배경화면에 처리된 금색이 그 신령스런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 방사형 포맷이나 후광 그리고 금색 모두 빛의 전형적인 표상형식들이며, 이로써 작가는 시인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시인에 대한 오마주를 보다 개인적인 층위에서, 노골적이고 섹슈얼한 형태로 표현하기도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단테의 <신곡>과 같은 하드커버로 된 저작의 겉장 표면에다 자위나 오럴섹스를 연상시키는 에로틱한 여인의 성적인 모습(작가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넣은 것이다. 이 작업에서 특히 눈으로 된 성기로부터 마치 절정에서 발해지는 신음소리처럼 새나오는 텍스트가 인상적이다. 이처럼 눈으로 된 성기는 여성의 성기에 눈알을 집어넣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저작 <눈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보는 것은 결국 상대(세계 혹은 텍스트)를 탐하는 것이고, 만지는 것이며, 종래에는 집어 삼키는 것이다.
여하튼 책을 읽으면서 이처럼 절정감을 맛본다는 것(책을 통째로 삼킨다는 것, 책과 섹스하고 진정으로 교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도 싶지만, 여하튼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결국 책을 정독한다는 것이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로써 작가는 독서행위를 일종의 성적쾌락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통해 문학저작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정신적 작업에 자신의 전부를 투자한 저자들과 그 업적에 대한 자신의 지극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한지석의 작업 :‘나’를 직시하기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거울 들판 // 저편에서 누가 부른다 // 누구요? // 거울 속으로 새 신 신고 들어간다 / 거울 속에서 헌 신 신고 나온다! // 누구요! //저편에서 누가 묻는다 / 거울 들판
- 허수경, 「거울 들판」


‘나’는 누구일까? 이 단순한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착해온) 질문에 답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 질문한다. “누구요?” 그러나 거울은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누누구구요요?” ‘나’와 같지는 않지만,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했던 그 마저 답을 피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작가 한지석은 자신의 얼굴에서 이 질문의 답을 찾는다. 그는 에서 자신의 얼굴로 전시장을 뒤덮었다. 벽면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온통 그의 얼굴로 가득하다. 작가는 ‘나’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는 색과 표정을 제거했다. 특히, 벽면에 일정 간격으로 걸려 있는 그의 얼굴은 물과 함께 놓이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다. 전시장은 동시에 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하나의 시점으로 포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얼굴이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신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변형의 폭은 물과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바닥에 놓인 사진 역시 같은 얼굴이지만, 누군가 전시장에 들어와 그 위를 걸어 다니면서 사진의 변형이 일어난다. 즉, 자신의 정체성은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타인’의 역할을 인식한 한지석의 작업의 분기점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국땅에서의 소외와 소통 단절은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언어가 아닌 대중적 이미지 특히, 신문 이미지였다. 특정 기사와 연관된 이미지이지만, 그는 언어적 부분을 떼어내고 이미지로만 인식했다. 이미지와 관련된 내용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미지에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더하여 낯선 이국땅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했다. 한국으로 돌아 온 그에게 영국에서 체득한 소통의 방식은 불필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에서 역시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가 소통의 전제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영국에서 이미지와 관계를 맺으며 고립되어 있었다면, 한국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고립(소통 부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기에 한국에서 그의 작업은 ‘나’ 자신으로 천착하여 ‘나’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본 것이다.
상이하게 보이는 두 시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이다. 물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을 바로 들여다보게 하는 기제였다. 자신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태도를 담아내면서 그곳에 물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은 에 있는 다양한 변형된 얼굴 중이 하나라는 것을 암시하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이 숲을 중심으로 하는 풍경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그 그림은 작가 한지석의 자화상인 것이다. 한지석의 화면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면서 생성한 추상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그 어지러운 흔적들 틈새로 보이는 (작가 자신일수도 있고, 작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 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또 다른 타인 일수도 있기에) 불특정한 인물과 그들이 형성하는 사건은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내재하며 비닐 봉투에 담겨 있던 의 물이다. 그 안에서 그는 끊임없이 변형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결국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에게 그 답은 중요하지 않다. 답을 찾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소통하며 (또는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을 직시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중요하다. 지금 작가 한지석은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낸시랭에 대한 짤막한 소견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튀는 행동과 언행으로 낸시랭은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에 자주 등장한다. 분명 그는 연예인에 준하는 관심을 받는 유일한 미술인이다. 학창시절 단순히 거장의 이름을 외우고, 재현의 맥락으로만 미술을 접한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은 풀 수 없는 암호문으로 인식한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닌 미술은 여전히 그들에게 낯설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에게 어필하는 낸시랭의 튀는 행동과 언행은 미술과 대중의 벌어진 간극을 좁혀준다는 의미에서 일견 의미 있다. 특히, KBS 어린이 미술프로그램 출연 이후 이번 레지던스 기간 중에 발행한 『엉뚱발랄 미술관』은 그 성과라 할 수 있다. ‘명화’ 또는 ‘거장’이라는 권위에 눌려 정작 미술 감상을 하지 못했던 어린이에게 생활에서 친숙하게 미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기에 그의 튀는 행동과 언행은 대중과의 소통과 목말라하는 미술계에서 일정정도 가치가 있으며, 적극적으로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언론에서 스스로 ‘자주(너무나 자주)’ ‘아티스트’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이유는 최근 개인전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대중문화의 산물인 핀업걸을 패러디한 그의 이번 개인전은 미술계에서 유례없는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상상을 초월한 가격에 미술작품이 거래 되었을 때도 언론의 이러한 관심은 없었으며, ‘대가’가 회고전을 한다고 했을 때도 이러한 관심은 없었다. 분명 낸시랭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언론은 낸시랭에 주목하는가? 도대체 그의 무엇에 주목하는 것인가? 대량으로 쏟아진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이번 전시의 기사 제목을 살펴보면, 언론사의 관심이 그의 ‘작품의 가치 평가’보다는 그의 ‘이름 값’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언론은 낸시랭의 작품의 가치 평가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그의 ‘아티스트’라는 자기 고백 이후의 주변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는 언론에 의해 텅 빈 기표인 ‘아티스트’가 되었다.
텅 빈 기표로서 ‘아티스트’. 낸시랭은 데뷔 초기부터 파격적인 노출을 통한 섹스어필을 작업의 중요한 상수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주요 요소이다. 자신을 프로모션해서 대중에게 이렇게 각인 시킨 미술인이 있었던가? 이 점은 분명 낸시랭의 장점이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준 핀업걸 사진은 스스로도 텅 빈 기표로서 ‘아티스트’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독창성은 결여되었으며, 사진의 완성도 역시 떨어진다. 어렵다는 현대미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지만, 종국에는 수많은 오해를 양산해 대중과의 간극은 더욱 커질 뿐이다. 이전까지의 작업은 차치하고라도, 이번 작업은 분명 또 다른 오해를 양산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의 쇼맨쉽에 (부정적이건 / 긍정적이건) 공감을 표하는 것이지, 그의 작업에 공감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아티스트’라고 외치기 이전에 작품의 미학적 완결성을 추구해야 한다. 낸시랭에게 향한 대중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본인 스스로 직시할 때가 되었다. 지금 그에게는 쇼맨쉽보다 더 중요한 것은 텅 빈 기표를 채우는 일이다.
낸시랭이 박영 레지던스 기간 동안 회화성에 주목하며 처음으로 시도했던 연작은 연작에서 보이는 단편적 개념도입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로 보여 졌다. 앞으로의 낸시랭의 그 이후 작업의 진척을 기대해본다.